작가노트

나의 작업 단상(斷想) 蘭芝島 서민의 哀恨, 처절한 삶의 몸부림

無明의 몸으로 묻어와서

     
     





 

나의 작업 斷想

1998년 5월

 

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꿈이다.
그것이 작은 꿈일 때는 잘 모르지만 큰 것일 수록 모양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큰 꿈을 가지고 깨어날 때 그 몸이 영혼성을 느낀다고 한다. 과연 우리는 육신의 몸으로 깨어나는 큰 꿈을 얼마나 정밀하게 만나고 있을까?

그러나 이 꿈이 육신과 둘일 수 없는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피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이 세상 자체가 꿈 동산으로 이루어진 꿈속의 여로를 경험하고 느낀 언어 표현의 조형적 유희(遊戱)가 곧 예술이며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꿈을 창조하는 자신의 언어를 설명하기 보다 그 본디에 숨어있는 욕망이 무엇을 향해 투혼을 불사르고 있는 것일 가를 자답해 본다.

이는 모든 예술에 있어서 어느 분야를 막논 하고 작업을 통해서 이루겠다는 야망보다는 이루기 위해 좇는 그 것이 예술적 속성이라는 본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다만 창조되어지는 그 무엇을 좇는 無作爲的인 행위의 현대성이라는 모든 창작예술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환경 문화에 따라 영향을 입기 마련이다.
창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는 새로운 것이라고 말 하지만 창조의 본 체는 이 세상 어딘가에 量(Energy)으로 남아서 모양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것이 서로 유기적인 緣起속에서 새롭게 보이는 것이라고 믿는다.

예술이란 일상과 그 환경을 떠나서 또 다른 새로운 그 무엇이 계속 기다리는 理想 國土가 아니다. 다만 자신이 그것에 목말라 하는 것은 평범한 진리 너머에 새로운 이상이 있음을 추구하는 욕망의 덫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무작위의 새로운 그것이 최근일수록, 다시 말해서 가장 늦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 모던한 것으로 현대성이 부여된다.

창조되어진 새로운 것 즉 현대성이라는 모던한 것에 주목해 보면, 과거는 이미 흘러가서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없다. 그러나 현재라는 순간은 흘러가서 없는 과거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대성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도 다 적용되는 것이므로 모던한 가치관의 올바른 존재가 결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음을 현실의 꿈은 일깨워 주고 있다.

따라서 모던한 새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는 과거를 관조하는 정신세계의 전통적 바탕 없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새것은 과거의 단절이 아니라 연장인 동시에 꿈의 지속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세상이 하나의 꿈일 때 그 누구도 꿈이 아닐 수 없다. 내 무작위의 행위가 가장 가까운 오늘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내 꿈의 파편들이다.

이 꿈 조각의 잔치마당에 오직 오늘이 있을 뿐이다. 창조라는 話頭에 매달려 신기루 같은 고통의 연속을 달리는 무궤도 꿈 열차에 실려 끝없이 돌고 잇다. 나는 이렇게 꿈을 먹고 꿈을 그린다. 그러나 언제쯤 꿈에서 깨어날 지는 모른다. 내 육신을 가지고 꿈에서 깨어나는 날 내 예술은 완성을 볼 것이다.

죽음 말고 그날은 있을 것인가? 번쩍이는 칼날 새우고 서방님도 없이 잉태의 꿈만으로 성자를 볼 참인지 생각은 저 하늘에 밝은 해를 보챈다. 산고의 아픔은 붓끝에 피어날 꽃망울이 되어.............

 





 

蘭芝島 서민의 哀恨, 처절한 삶의 몸부림

 

1985년 봄 계간 미술 통권 33호

 

현대에 와서 동서문화가 융합된 대중문화의 개방적 단면은 시대적 지역적 발전 형태에 따라 우리사회가 겪어야 할 진통이다. 최근 화단 일각에서는 모더니즘의 청산 및 현실표현을 현대적으로 제시하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이고 있다. 韓國畵 쪽에서도 강 건너 불 보듯 방관할 수 없는 입장이고 나 또한 심한 갈등을 느낀다.

처음에 안방에서 출발하여 관광지, 농촌 도시의 공장지대로 옮겨 다니면서 서민의 애한을 찾아 몸부림을 쳤다. 한동안 ‘사회풍자와 ’병행해 ‘풍토’시리즈를 다루면서 생활 환경의 변화가 심한 서민의 문화를 찾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의 스케치 여행이 ‘서울의 하늘 아래’라는 작품의 소제가 되었다. 그곳이 바로 蘭芝島, 서울 시민들이 버리는 쓰레기가 모이는 곳이며 서민의 애한이 담긴 몸부림의 현장이었다.

수색에서 상암동으로 이어지는 마포 성산과 연결되는 곳. 산처럼 쌓인 쓰레기더미 사이로 이끼낀 초록색 썩은 물이 흐르는 샛강이 있다. 그 위에 녹슨 철교, 겨우 차 한대가 다닐 수 있는 비좁은 길이 난지도 마을로 연결된다. 울퉁 불퉁한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칠백여 가구의 집단 촌에 탁아소가 보이고 미장원과 개척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골목 이곳 저곳에는 쓰레기 더미에서 골라낸 폐품덩이가 무질서하게 사방에 흩어져 있고 온갖 잡 쓰레기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 주위에는 큼직한 살찐 파리들이 양봉장의 벌 때보다 많아 얼굴에 부딪혀 걸어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형형 색색 온갖 것들이 모여 뒹구는 땅 위에, 이곳의 집들은 화전민이나 난민촌은 오히려 비교가 되지 않는, 쓰레기 조각으로 만든 ‘오브제작품’이었다.

재료 해방 행위전이나 다다 예술제라고나 할까. 참으로 눈뜨고 보기 어려운 삶의 현장이었다. 하루 열두 시간 이상을 먼지 속에서 일한 대가가 고작 3천원 정도라는 주민의 말이 믿기 어려웠으나 이곳 사람들만큼 억척스럽게 사는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그들의 처절한 여름 살 이는 분명 서울의 하늘아래였다.

삶 그것은 차라리 몸부림이다. 창작을 향한 작가의 불타는 욕망도 몸부림이지만 문둥병보다 무섭다는 가난과 싸우는 사람들의 삶도 몸부림이다. 이들은 몸부림을 통해, 삶을 이루어 나가면서 행복을 발견한다. 작가가 고통의 몸부림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결국 죽는 날은 해방되겠지만,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창작 세계를 찾아낸 자는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하기야 고통도 해방도 없는, 그리기 기능 보유자나 붓만 잡으면 자칭 작가라고 우쭐대는 편한 사람들도 있다. 매스컴의 눈부신 힘에는 맥을 못 추고 꼼짝 죽어버리는 자들의 병폐도 문제지만 옥석을 가려내지 못하는 전달자의 눈도 매 한가지이다.

더구나 같은 문화를 누리는 글줄이나 쓰는 분들의 옳다는 비평들도 ‘못 찾겠다 꾀꼬리’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 날만큼 그 내용을 알기 어렵다. 어느 분야의 누구든지 자기 지식이 눈 높이만큼 만 헤아리는 자(尺)에 불가할진대 자기의 자는 다 잴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아니면 허세나 위장의 몸부림 일게다. 결국은 모두가 몸부림. 형태가 다를지라도 삶은 몸부림이다.

물질적인 삶이건 정신적인 삶이건 몸부림 없이 새로운 대답이나 창조가 있겠는가. 붓을 잡으면 고통이 시작되지만 몸부림이 클수록 값진 창조가 된다는 숙연한 생각이 나를 흔든다. 이것도 나 혼자만의 고통이 아님을 위안하면서 이 겨울, 난지도 사람들을 회상한다.

 




 

無明의 몸으로 묻어와서

1992년

 

사바의 오욕으로 날갯짓하는 삶이 무엇인들 고통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만은 창작하는 삶의 고해는 파고가 더 높은 것만 같습니다. 작가마다 의식세계의 이상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창조한다는 의욕의 본질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창작하는 사람들은 어느 분야의 누구나 할 것 없이 남이 하지 않는 것을 자기만이 해내는 독특한 세계를 열어 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작업을 저마다 열심히 찾아 나섭니다. 자신도 그것을 찾아 헤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독특한 작업을 찾는 고통은 쉽사리 해결되어 만족으로 연결되지가 않습니다.

설사 세상에서도 없는 독특한 것을 만나서 만족으로 연결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잠시 뿐입니다. 얼마 못 가서 사라져 버리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존재와 다르지 않음을 느낍니다. 이러한 저의경험이 독단일지 모르지만 오로지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의 특이한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 있다면 비평적 언어의 遊戱이거나 욕망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어서 고통은 더욱 커지는 것이라 믿습니다.

저의 이러한 창조의지는 저 혼자만이 갖는 특별한 세계의 도전이 아닙니다. 이미 이 세상 어딘가에 있어왔던 모든 것들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성숙되어 가는 가운데 자기의 세계를 완성의 모습으로 열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 생각씩 옮겨가는 자신의 모습은 돌아오지 않는 過去, 또 멈출 수 없는 現在. 막지 못하는 未來라는 인생열차에 실려가고 있습니다. 생의 중반을 넘어서서 어느 산허리의 간이역을 지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변화된 자신의 모습은 아직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업실의 삶 또한 오직 창조의 苦惱로 늘 갈등을 상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목말라 하는 의식을 통하여 존재하고 있는 모든 세계를 다시 새롭게 만나는 일이야 말로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목마름은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은 충족하기 어려운 理想으로서 그 기저에 숨어있는 원초적 욕망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욕망을 창작 이상을 실현하여 解放하고자 하는 것이 작가정신이 안인가 싶습니다.

그리고 자유스러운 표현 의지와 관계되는 여러 조건들 가운데서 創造라는 보다 큰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의 대 생명인 모든 삶의 본질에 대한 고뇌를 끌어내고자 하는 초월적 갈망이 그 본래 모습이라고 여겨집니다. 여기서 다시 작위의 산고를 토로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이러한 표현 의지의 갈망인 내 過去生의 잠재가 무명의 몸으로 묻어와서 今生에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어쨌든 자신을 형성하던 시기에 그림을 그리고 쓰기를 좋아하던 감성 욕구가 평소의 버릇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버릇이 습관으로 쌓여서, 쌓인 때가 業이되고, 업은 운명이 되고, 그 운명은 오늘의 내가 되었나 봅니다.

그러나 성직을 만났던 젊은 날의 인연이 내 인생의 里程標가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존재의 實相인, 우주의 대 생명을 님으로 사모하고 그리워 하는 마음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님을 보지 못한 迷惑한 눈에 비치는 현상인, 오늘이라는 모든 현재는 그 이전에 어딘가에 있었던 현재 자체의 無明業 때문이라 합니다. 이와같이 현재는 過去의 한 모양인 동시에 과거 또한 현재 때문에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나는 未來의 나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이 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피어난 내 모습은 자신의 한 송이 야생화를 열심히 가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상의 향기로 대하는 안목을 기르기 위해 이름 없는 꽃의 노래를 귀담아 들으면서, 그 근원의 생명력을(公案) 話頭삼아 마음을 모으고 觀하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려 번뇌를 녹이고, 또 더하여 지혜를 열고, 마침내는 존재의 실상을 얻는 깨달음의 인연을 만나게 해 달라고 늘 발원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미완의 모습으로 남아 煩惱로 피어나는 꽃답지 못한 꽃향기에 취해서 생명의 끈은 짧아져만 갑니다. 불변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지만 변하지 않는 절대가 있다 해도 有眼的인 肉化의 눈으로는 살필 수 없는 저 허망 무상한 생명의 끈이다 하는 날까지 작업실의 삶으로 열심히 精進하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사모하는 내 實相의 님을 만나는 모습으로 回向하여 더욱 큰 그림잔치 열어 모든 분들 앞에 공양 올리기를 원합니다.
끝으로 이 작품전을 초대해 주신 東山房畵廊 朴周煥 사장님과 작품에 논을 써 주신 尹凡牟선생, 촬영을 맡아주신 이휘세선생, 편집에 도움을 주신 주재환선생, 인쇄를 맡아주신 金月漢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늘 작업실에서 고락을 같이해온 저의 반려자 法海晟에게도 그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준비하는 과정은 사뭇 바쁘고 번거로웠으나 오늘에 있기까지 물심으로 지원해 주신 주위의 친지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올립니다.
앞으로 계속 아낌없는 격려와 채찍을 주셔서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정진의 힘이 되게 하여 주시길 천만 바라오며 合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