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윤범모 (미술평론가) 1992년, 8월

 
深山幽谷에서 蘭芝島까지
 
(允山 강행원의 예술세계)
 
1, 破格의 아름다움

파격의 아름다움있다. 요즈음같이 규격화된 세상에서 무엇인가 열외는 눈길을 끌기도 한다, 모범생 지상주의 세계에서 국외자는 주목을 요하기도 한다. 이 기계화시대의 산업사회에서 우리는 규격화 인생에 적당히 안주도 하면서 때로는 진저리를 칠 때도 있다. 왜 누구나 국화 빵 모양의 비슷한 모습으로만 변해가고 있을까, 과연 몰개성의 시대인가, 누구나 표준화되고, 그것도 평준화되고 확인화 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그래도 列外에 대해여 관심을 두게 된다. 특히 破格을 기대도 하면서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파격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왜 그랬을까, 윤산 강행원을 생각하면서 나는 파격부터 떠올랐을까, 그 동안 그의 삶에서 그와 같은 내용을 느껴서일까 아니면 세속적인 일상사에 쪼들리다 보니까 무엇인가 예외와 만나기를 은근히 바랬음일까. 어떻든 윤산은 상식적인 궤도에서 갇혀 있기보다는 무엇인가 남 다른 족적을 추구해 왔다. 이와 같은 단서조항이 傍點을 요하고 있다. 생각해 보자, 윤산은 그 흔한 화단 사적 계보와 그렇게 친연성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 흔한 화맥과 연결되지 않았다. 독학의 바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 간단히 처리할 문제는 아니다.

출신학교와 인맥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미술계에서 윤산은 확실히 예의적 존재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알기에 그는 자수성가의 피나는 청년 시절을 경과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漢學의 분위기에서 세상과 첫 대면을 했다. 지나간 王朝時代의 전통과 아무런 여과작용 없이 만났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의 특징이기도 했다. 스승도 없이 해결했다. 芥子圓畵帖 같은 것이 스승이라면 스승이었다. 필력의 단단함은 스스로 쟁취해야 할 荒野였다. 그 길은 뒤에 서예나 전각의 漢子文化圈의 유산과 접근되는 길목이 되었다,

화가로 득명하기 이전의 윤산에게는 서예가로서의 움직임이 더욱 많았다. 사실 생업의 방편으로도 서예가 있었지만 전각의 세계도 무시할 바가 못되었다, 글씨를 쓰고 刻을 하고 또 그림을 그리는 윤산의 바탕은 그 만큼의 忍苦의 세월을 요구했다. 하지만 지나간 시대의 유습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었다. 무엇인가 스스로의 파격이 요구되었다, 대부분의 작가가 전통계승 운운하면서 시대 미감이 결여된 구태에서만 연연한 때 그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준비해야 했다. 윤산은 7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古法에서의 탈출을 시도했다.

관념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畵譜를 떠나서 自然을 스승 삼아 전국을  歷하며 현장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현장 작업을 모아 77년도 9월에 東洋畵 寫生展이란 명제를 걸고 파격의 첫 전시를 갖는다, 이는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으로는 결코 쉽지 않는 명제다. 그러나 선각의 개척자는 항상 외롭기 마련이다, 특히 그 무렵은 관념적 전통산수화에 의해 주도되던 시대라서 별로 큰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후 실경산수의 수묵화 운동은 점자 확산하여 갔다. 윤산은 그러한 변혁 확산의 공과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다짐으로 정진을 감행하였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이르러 심삼유곡의 수묵세계에서 난지도의 현실세계로 까지 기나긴 항해의 여정을 보였다, 물론 이와 같은 바탕에는 그의 개인적인 생활 방식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유년시절 그는 사촌형인(불교계의 대선사이신) 淸華 큰스님이 정신적 영향을 크게 입어 일찍이 佛家에 입문했다, 苦行의 길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世界觀 구축에는 더 할 수 없는 道場이었다. 그곳에서 윤산은 看經은 물론, 禪是佛心이요, 敎是不語라는 세계를 육화시키는 參禪修行을 했다.

하지만 이 불가의 생활은 군 제대 후 환속으로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세계는 불교적 사유방식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동양의 붓을 든 오늘날의 화가에서 있어 이렇듯 佛音의 세계는 커다란 자양분으로서 하나의 寶庫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윤산은 동양사상의 철학적 배경과 함께 필력을 겸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판에 박은 전통이나 팔면서 요순시절에만 안주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하나의 파격이기도 하다.


2, 무릉도원에서 난지도로

계보 밖의 윤산은 숱한 좌절과 소외감을 딛고 일어서게 되었다, 그것의 첫 기착지는 삶이 있는 현장이었다. 따라서 그의 蘭芝도행은 결코 우연의 산물은 아니었다, 윤산은 언젠가 이렇게 토로한바가 있었다.

"처음에는 안방에서 출발해 관광지, 농촌, 도시의 고장지대로 옮겨가면서 시민의 哀歡을 찾아 몸부림을 쳤다, 한동안 "사회풍자"와 병행해 "풍토" 시리즈를 다루면서 생활환경의 변화가 심한 서민의 문화를 찾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의 스케치여행이 <서울의 하늘 아래>라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곳이 바로 난지도, 서울시민들이 버리는 쓰레기가 모이는 곳이며 시민의 애환이 담긴 몸부림의 현장이다."

그렇다 윤산은 서민의 哀歡이 담긴 몸부림의 현장으로 내려온 것이다, 저 동양의 현학적인 세계에서, 저 전통의 고답적인 세계에서,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삶의 현장으로 내려 온 것이다, 그것은 동세대의 전통화가와 비교해 보았을 때 하나의 파격이기에 충분했다.
윤산은 무릉도원에서 난지도로 내려왔다, 아니 올라왔다. 그것은 삶의 처절한 현장이었다,

윤산은 그리기 기능 보유자 같은 수준의 고매한 작가노릇을 파괴하고 현장에 서기를 택했다. <관세음보살의 민중불교 역할도>(1985)같은 작품은 윤산세계의 새로운 표정이 되었다. 흔한 말로 造形性이 어떻다느니 하는 기술적 차원은 논외로 하자, 무엇보다는 작품의 기저에 깔려 있는 작가의 분노와 애정 그리고 동시대 현실에 대한 증언이 주목을 요하고 있다.

화면의 상단부에는 채색의 관음보살이 가부좌하고 있다. 그의 千手에는 연꽃과 해골 그리고 밥과 돈이 들러져 있다, 世慾의 단면이다, 하지만 관음보살아래의 화면 하단부에는 수묵의 난지도가 깔려 있다. 쓰레기더미에서 폐품을 골라내는 서민들의 삶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있다. 종교의 세계와 현실세계의 괴리만큼 화면은 양분되어 있다. 그것은 상부와 구획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화사한 채색의 세계와 검은 수묵의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

이 작품은 확실히 80년대라는 변혁시기가 바탕에 스며있다. 그러면서도 보수적 색채로 가득 찼던 "호국불교의 전통"에서 벗어나 참종교 즉 민중불교운동의 기운과도 천연성이 있는 작품이다. 어떻든 장식적이고 관념적인 세계의 전통화단에서 윤산의 시대증언적인 시각은 돋보이게 되었다. 그는 난지도 쓰레기 하치장에서 쓰레기더미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오브제작품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또한 쓰레기 자체가 재료해방 行爲展이었고 또 다다예술제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시대정신의 배경을 갖고 윤산은 역사적 현장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피의 화요일,>이 그렇고 광주민주화운동을 주제로한 <5월의 노래> <눈물도 말라버린 어머니의 한>이라든가 전두환 군사정권을 비판한, <고문풍자> 그리고 민족분단의 극복을 희구한< 통일염원>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전통화단에 있어서 시대의식의 첨예한 반영은 보기 드문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유화 매체를 다루는 일군의 작가들에 비하여 전통적인 붓을 든 작가들은 비교적 보수적인 색채를 무겁게 지고 다녔다. 그런 분위기에서 윤산은 앞 서 가는 선배세대에 속한 작가였다.


3. 역사의 숨결이 흐르는 땅에서

允山의 조형적 소재는 다양한 편이다. 전통적인 산수화 기법을 딛고 일어선 후 다양한 우리시대의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도시로부터 근교나 농촌 풍경에 이르기까지, 혹은 여름이나 겨울풍경, 산악지방이나 해변가 등등으로 다양하다. 인물화 계통 역시 다양하다. 대개의 산수화가들은 인물묘사에 취약점을 보여 왔었다. 능숙하지 못하는 인물묘사의 교육풍토는 구시대의 잔재일 것이다. 사람이 없는 자연, 사람이 있어도 형식적으로 왜소하게만 표현하는 자연, 산수화 속에서 비중 있게 인물을 다룬다는 것은 특이한 예에 속할 정도였다.

하지만 인물도 인물 나름이다. 지극히 情態的인 인물로서 화석화되어 있으면 그것도 문제이다. 표정이 있는 인물, 일하고 있는 인물 등은 쉽게 만날 수 없었다. 세계관의 차이에서 온 결과였다.
왜 유한적인 인물에만 초점을 맞추었을까. 이와 같은 옛 그림의 분위기에서 윤산은 삶이 있고, 또 노동이 있는 현장 속의 인물을 형상화했다. 이렇듯 다양한 소재를 본격적으로 소화하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는 80년대라는 시대가 바탕에 깔려 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지난 1987년 중앙일보에 1년간 연재했던 황석영 소설 <백두산>의 본격삽화를 담당한 것이 하나의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소설의 분위기에 따라 풍경과 인물 등을 다양하게 다루다 보니까 나름대로 ‘산수+인물’의 화면이 정착된 듯하다.근래의 允山은 대개 다음과 같은 소재의 작품을 주로 하고 있다. 1. 일하는 사람들 2. 다리문화, 식민잔재와 그 변화 3. 역사의 숨결이 흐르는 땅 4. 시골정취의 서정 5. 무속신앙과 탈놀이 6. 중국풍경 등이다.

대개 삶의 현장과 역사의 현장 그리고 시골풍경과 무속과 불교적 세계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특히 근래의 작품은 기왕의 장르 구분인 한국화와 서양화라는 틀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 물론 어떤 재료를 사용하든지 간에 우리의 정서를 기초로 하여 한국인이 그렸다면 그것은 한국화요, 곧 우리 그림일 것이다. 형식과 내용도 이룩하지 못하고 명칭만의 한국화는 문제가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인이 그림을 그려 놓고도 다만 그 재료가 서양식 유화물감이라 하여 서양화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일 것이다. 서양화는 서양인의 그림을 두고 일컫는 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允山은 어떻든 형식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의 그림을 그리려고 애쓰는 작가이다. 근래의 그는 종이보다는 광목이나 나일론계통의 부직포 같은 천을 주로 사용한다. 기존의 재료가 주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부수기 위해 새로운 매체에의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允山은 천을 화공 처리하여 바닥을 아교와 젤라틴으로 덮인다. 그리고 물감은 기왕의 동양화의 채색물감을 비롯, 수묵 등과 함께 아크릴 칼라를 혼용한다. 水性의 이 물감들은 갈아 쓰거나 녹아 쓰는 것으로 아크릴과 제법 어울린다. 물론 아크릴을 덜 사용할 때는 무광코팅 효과도 낸다.

어떻든 표현재료는 가능한 한 모두 활용해보고 싶은 것이 오늘의 允山마음이다. <난지도> 같은 작업을 할 때는 밑바닥 인생의 삶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 종이대신 광목 위에다가 채색으로 다시 그리기도 했다.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 표현기법도 바뀔 수밖에 없는 특성을 그는 인지하고 있다. 允山의 일하는 사람들 풍경 속에는 우리시대의 아픈 삶이 들어있다. 소외지역이 크게 부각되어 있다. 성실히 살고 있으나 구조적 모순 때문에 고달픈 인생이 있다. 연탄배달부 아저씨, 노점상 할머니, 미화원 아저씨, 굴 따는 아낙네, 밭 메는 여인, 달동네의 아줌마 그리고 선착장이나 난지도 풍경이 등장되고 있다.

근대식 교량의 본격적인 전개는 일제 시대부터 일 것이다. 允山은 그 다리에 주목을 하면서 주변풍경과 함께 식민잔재라는 의미에서의 역사적 시각을 다듬었다. 특히 <금강산 가는 길>은 일제의 기술에 의해 만들어 졌으나 6.25때 파괴된 다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파괴된 다리만큼 분단민족의 아픔을 묘사하며 통일의지를 곧추세웠다. 역사의 숨결이 흐르는 땅은 새삼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특히 전통화단에서의 무관심 된 부분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동진강은 흐른다.>는 水稅사건이 발단되어 부안 백산에서 시작된 민중 봉기가 12일간의 전주성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휘자인 전봉준은 이내 쫓기는 몸이 된다. 이 같은 민중의식의 대두를 允山은 짜임새 있게 형상화했다. 특히 1989년 아직도 존재하고 있던 水稅가 말썽을 빚게 되자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하던 농민들의 모습을 보고 允山은 작가적 발언을 가다듬은 듯하다. 전봉준에 얽힌 그림으로는 <백산으로 모여들다><곰나루>등이 더 있다.

시골정취를 서정적으로 담은 그림은 많다. 지역 역시 다양하다. 담양, 강화도, 제주도, 동해안, 고군산열도, 등 우리의 국토가 힘있게 재형상 되었다. 무속 신앙적인 소재로는 <靈媒>나 <神 내림>같이 무당을 소재로 한 것이 있다. 탈놀이 계통의 채색화는 한결 다채로운 화면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불교소재로는 結制의 독살이 夏安居에 들어간 수행승의 모습이 단정한 토굴 암자와 함께 드러나 있다. 또한 <보리방편문>은 일월성수의 山河와 四神圖가 불타와 함께 한자리에 있어 눈에 보이는 모든 現象世界를 佛性으로 보는 法門으로 대체한 듯 한다.


4. 이름 없는 꽃의 노래를 듣다

80년대의 윤산은 역시 격동적으로 지내왔다. 그러나 근래의 그는 태풍 뒤의 정적처럼 깊은 내면의 세계로 침잠 되고 있다. 세상을 보는 시각도 한결 폭이 넓어졌고 깊어지는 듯한 느낌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삶의 고해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이 번뇌의 세계를 오로지 그림으로 풀어 보려고 나름대로 입장이 정리되었다는 뜻이다. 윤산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한 송이 野生花를 萬象의 향기로 대하는 안목을 기르기 위해, 이름 없는 꽃의 노래를 귀담아 들으면서 그 근원의 생명력을(公案) 話頭 삼아 마음을 모으고 觀 하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려 번뇌를 녹이고 또 더하여 지혜를 열고 마침내는 존재의 실상을 얻는 깨달음의 인연을 만나게 해 달라고 늘 발원합니다.”

여기서의 깨달음은 물론 보살정신의 대승적 구현일 것이다. 上求菩提하고 下化衆生하는 정신 말이다. 그렇게 하여 역사 속에 우뚝 솟을 때 우리그림의 전통도 새롭게 자리 매김을 하게 될 것이다. 사적인 공간에서 역사적 공간으로 부상될 때, 또 그것이 밀실이 아니라 우리 사회라는 열려진 공간으로 나와서 사회적 맥락에 편입될 때 화가의 발언은 그만큼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윤산의 미래에 보다 진일보된 세계가 도래할 것을 기대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