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이성부(시인) 가나아트 1989년 3-4월호

 
 
윤산이 찾은 우리시대의 공통분모

                                                                                                                 

  

윤산 강행원의 작품에는 공해와 공장지대를 주제로 한 彩墨과 난지도 일대의 풍경 그리고 서정적 농경산수가 등장하기도 하고 현실적 모순이나 민족역사가 기록되기도 한다, '삶 자체가 몸부림이다' 라고 말하는 그는 화업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화가의 몸부림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여러 장르의 창조적인 예술가들에게 있어 예술가 개인의 체험과 ' 경험'은 그 예술 작품 형성이 뿌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또 하나 보태지는 필요조건, '상상력'은 그 뿌리에서 자라난 줄기니 이파리라고 보아 무방하다. 예술가가 지니는 사상이나 감정도 결국은 체험과 경험(지식의 축적을 포함해서)에 의해 얻어짐은 물론이다. 우리는 뿌리가 없는 줄기나 가지를 상상할 수가 없다, 한 작가가 어떤 시대의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또 살아왔는가, 그리고 그가 체험과 내용들은 어떤 특수성과 보편성을 지니는가, 이 같은 물음과 이에 대한 대답은 그 작가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고, 그 작품의 핵심을 풀어 가는 데 열쇠와도 같은 것이 된다,

대부분의 진실한 작품들엔 그 작가의 경험과 체험이 어떤식으로든 깔려있기 마련이고, 그것들을 새롭게 해석해 봄으로써 감상자의 기쁨은 훨씬 배가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견한국화가로 80년대부터 화단의 전면에 나타난 윤산 강행원(允山 姜幸遠)의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그의 삶의 궤적에 깊은 호기심이 일어나곤 했었다, 공해(公害)와 공장지대 등을 주제로 삼은 먹(墨) 그림이라든가, 서울 변두리 난지도 일대의 풍경과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을 담은 그림이라든가, 서정적인 농경 산수(農耕山水), 또는·현실적인 모순이나 민족역사의 문제를 다룬 그림들에서 작가의 개인사(個人史)를 알고 싶은 충동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이 충동과 호기심은 윤산과의 몇 차례 만남을 통해 점차 충족되기에 이르렀다.

"....울통불통한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칠백여 가구의 집단 촌에 탁아소가 보이고 미장원과 개척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골목 이곳저곳에는 쓰레기 더미에서 골라낸 폐품덩이가 무질서하게 사방에 흩어져 있고, 온갖 잡 쓰레기가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 주위에는 큼직하고 살찐 파리들이 양봉장의 벌떼보다 많아 얼굴에 부딪쳐 걸어다니기가 불편한 정도였다. 형형 색색 온갖 것들이 모여 뒹구는 땅위에, 이곳의 집들은 화전민이나 난민촌은 오히려 비교가 되지 않는, 쓰레기조각으로 만든 '오브제작품'이었다. 재료해방 행위전이나 다다예술제 라고 할까, 참으로 눈뜨고 보기 어려운 삶의 현장이었다. ..."

윤산이 85년 봄<계간미술>지에 쓴 '난지도 서민의 哀恨, 처절한 삶의 몸부림' 이라는 글의 한토막이다. 나는 그가 스케치를 위해 난지도를 찾았으며, 난지도 현장의 경험을 통해 「서울의 하늘아래」라는 작품을 완성시켰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울의 하늘아래」에 있는 난지도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공교롭게도 그가, 난지도를 , 화폭에 담은 것처럼 나도 70년대 말의 한철동안 난지도를 드나들며 몇 편의 시를 쓴 적이 있다, 윤산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이상하리 만큼 닮은 데가 있었다. 나의 「난지도 1979 이라는 시를 참고로 인용하자,

<아름다운 자기 이름을 가진 서울 변두리 난지도에 와서/난지도 공기를 만나도/사람 사는 마을을 들여다보면 안다/난지도에 와서/우리 나라 시월하늘/눈비비며 바라보면 안다/아니오 아니오/ 아니오임을 안다/파리떼에게도 한잔 먹어라/소주잔을 권하고/썩은 물 웅덩이에도 희망의 손발을 씻어내는/난지도에 와서 보면/우리 나라 시월하늘/서럽다 못해 왜 불타는 노을로 소리치는가를 안다/ 왜 살아서 스스로 부서지고 싶은 것인가를 안다/쓰레기에 파묻혀 놀던 개구쟁이들이/쓰레기 더미위에 누어 하늘을 우러른다/ 제복의 여학생이 수색종점에서 내려/십리길 걸어, 쓰레기 산 또 십리를 넘어/ 쓰레기 움막으로 기어든다/밤이되어/봉화산의병 닮은 횃불들을 들고/밤하늘 덮는 먼지 속 몰려가는 사람들/어해야 디야.에헤야 디야/쿵작작 쿵작작/여기서도 왼종일 라디오소리 들리고/향수 뿌린 여인이 있어/악취에 코막힌 사내들의 가슴을 후벼준다/서울은 거대한 오물 하치장/개 돼지 짐승들도 숨막혀 아우성만 커진곳/사람과 쓰레기가 한몸이 되어/파리떼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고/온갖 꽃을 피우고/바람을 부르고 비를 부른다/난지도에 와서/사람을 만나고/사람의 마을을 들여다보면 안다/ 왜 모든 것이 아니오/아니오 아니오 인가를 비로소 안다.>

서로 몰랐던 시절의 두 사람의 관찰이 묘하게 일치하고 있다. 서울 하늘 아래에 있는 "난지도"의 의미는 곧 우리 시대의 고통 자체이다. 이 고통은 우리의 시대를 결코 긍정할 수 없게 만드는 '암울의 덩어리'이다, 조국 근대화다, 중진국이다. GNP가 얼마다 하는 식의 화려한 낱말들이야말로 난지도 쓰레기더미에 파묻어 버려야 한다는 것을 난지도의 고통은 우리에게 일깨워 주지 않았던가, 난지도 사람들의 삶이 우리와는 다른 삶이라고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윤산은 그 난지도를 먹으로 그리고 있다. 때로는 담채(淡彩)로도 그린다, 북북 진한 먹빛으로 칠해진 나무나 전신주, 비뚤어진 움막집의 골격들은 어딘가 노여움이 형상을 만들어낸다. 엷은 먹빛으로 칠해진 하늘도 어둡고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사람도 보이고 굴뚝도 보이고 자동차도 보이지만 그것들은 모두 패배와 절망의 의식(儀式)처럼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갈필(渴筆)의 먹자국도 예사롭지가 않다, 난지도 사람들의 마음의 메마름처럼, 또는 작가의 '타는 목마름'처럼 붓이 가고 잇다, 그리하여 이 그림들에서는 한결같이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어떤 '떨림' 이나 '울림'의 그 소리들이다. 그리고 아름답다! 그는 악취나 더러움을 먹의 향기와 깨끗함, 또는 맑음으로 바꿔놓고 있지 않는가. 그는 난지도 사람들의 암울한 삶에 희망과 사랑을 쏟아 붓고 있는 셈이다.

"....삶, 그것은 차라리 몸부림이다. 창작을 향한 작가의 불타는 열망도 몸부림이지만 문둥병보다 무섭다는 가난과 싸우는 사람들의 삶도 몸부림이다, 이들은 몸부림을 통해, 삶을 이루어 나가면서 행복을 발견한다, ...."

앞에서는 인용한 윤산의 같은 글에 결코 우리 시대의 삶이 비참함과 고통 속에서만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몸부림' 의 삶을 계속하면서도 '행복'을 별견하고 추구하는 건강성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그의 난지도 경험이, 적품을 통해 아름답게(美라기보다는 차라리 善에 가깝게)승화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그는 난지도 '밖'에서 사는 가난하고 외로운 화가의 한사람일 뿐이었지만, 그가 난지도 '안'을 들여다보고, 난지도 안의 현실인식에 도달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안에서 살고, 난지도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면서 이 같은 인식을 갖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그의 체험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몸으로 살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삶에 공감하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 괴로워했다. 그가 그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난지도의 절망과 희망은 그러므로 체험과는 약간 뉘앙스가 다른 경험의 소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붓을 잡으면 고통이 시작되지만 몸부림이 클수록 값진 창조가 된다는 속연한 생각이 나를 흔든다, 이것도 나 혼자 만의 고통이 아님을 위안하면서 이 겨울, 난지도 사람들의 삶을 회상한다."
이렇게 말하는 윤산은 이제 저 거들먹거리는 개인주의로서 예술가가 이미 아니다, 그는 그의 삶의 경험과 또 다른 체험들을 통해 공동체적 아픔을 자기자신의 것으로 껴안는 작가의 한사람이 된 것이다,

윤산은 전남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가 고향이다, 1947년 태생이니까 광복후 혼란과 어수선함, 그리고 너나 없이 어렵게들 지내던 농촌 환경이 그의 유년을 지배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농사꾼이자 서당 훈장을 지냈던 한학자이기도 하다, 강직한 선비기질에, 틈틈이 먹을 갈아 글씨를 쓰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의 어린 시절이 많은 영향을 받았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4살 때 천자문을 땠으며, 이 무렵부터 혼자서 곧잘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주의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집에서 시오리나 떨어진 운남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인근 마을에 '그림 잘 그린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그의 그림 재주는 그대부터 대단했던 모양이다,

집에서 가용으로 쓰던 달걀, 깨 등을 훔쳐다가 팔아서 크레용, 도화지 등을 사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완고했던 아버지는 그가 그림에 열중하는 것을 볼 때마다 호되게 나무랐다. 그림을 그리다가 아버지에게 들키면 혼이 났기 때문에, 숨어서 그리는 것에 익숙해졌다, 집에 그리거나,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초상화를 4B 연필로 그리곤 했었다, 이때 그가 그린 이승만 초상화는 초상화가 없는 다른 교실의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받았다고 한다, 초등 학교 4학년때, 담임교사의 설득과 권유로 아버지도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림은 그리되, '채색은' 환이니까 하지 말고 사군자 정도만 그려라'하고 허락했다. 오늘날의 윤산그림의 기본적 작품격이 된 서예와 사군자는 이렇게 하여 그의 몸에 익힌 바가 되었다.
어린 시절에 발휘된 이 같은 솜씨와 자신감은 훗날 그가 걷는 화업(畵業)의 길에서도, 중요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골에서 초등 학교와 중학을 다닌 그는 고등학교를 광주의 조선대 부속고교로 진학한다. 이 고등학교는 당시 미술부 활동이 두드러진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오늘날에도 많은 화가를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다, 윤산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을 하기 위해 이 학교에 들어간 것이지만 결국 주간(晝間)에서 야간(夜間)으로 옮겨야한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낮에는 급사 생활을 하고 밤에만 학교를 다녔으므로, 미술반에서 활동할 겨를이 없었다. 미술반이 유명한 학교에서 미술을 배울 수가 없다니..., 화구를 들고 야외사생을 나가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그는 한없는 부러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주말에는 광주의 서예가 남용 김용구(金容九作故) 의 서예학원에 나가 서도(書道)를 더욱 연마했으며, 밤에는 혼자서 석고데생을 되풀이했다. 가르쳐 주는 선생도 선배도 없었으나, '그림은 나 혼자서 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니까 하는 것' 이라는 일념으로 데생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대학 진학에서도 그는 또 한차례의 시련을 겪는다, 역시 미술을 반대하는 가족들이 입장과 자신의 희망 사이에서, "나는 미술대학을 가고 싶었는데, 형은 법과대학을 가라고 우기시는 거지요 당시 교육비는 형이 대주셔야 하는 형편이니 형의 말씀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유명한 서울의 K대 법대를 일개 지방의 야간 고교 출신인 내가 어떻게 합격하겠습니까, 보기 좋게 낙방을 하고, 미대는 형의 반대로 안되었고, 그래서 한참 고민하다 중이 되었습니다." 윤산은 고교시절부터 이미 광주 불교 학생회에서 활동했으며, 사촌형인 청화스님의 영향을 받아 평소 불가(佛家)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따라서 그는 대학진학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불문에 든 것이 아니라 '불교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 입산(入山)울 한 것이다,

그는 청화큰스님의 있는 해남 대흥사(大興寺) 진불암으로 들어가 행자생활 수좌 생활을 거쳐 정식 승려가 되었다, 그리고 청화스님을 따라 곡성 태안사로 옮겨 6,25 전란에 타버린 대웅전을 중건하는데 힘을 보탰다. 다시 구례 화엄사로 옮겨 지객(持客) 「절에 오는 손님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이후 여러 곳으로 전전하다 서울에 머물면서 불교대학 승가학과에 적을 두었다, 대학에서는 본격적인 불경공부를 하는 한편 학생운동에 간여했는데 당시 5.3, 6.8데모 등으로 중도에서 그만 두어야 할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홀연히 서울을 떠나 부산에서 멀지 않은 황영산의 동남쪽 기슭에 자리한 대덕암에 박혀 책을 읽고 그림을 다시 시작했지요"

혼자서 생활하는 암자생활을 그는 독살이(獨生) 라고 했다, 그의 독살이는 그러니까 곧 자기자신의 싸움이며 자기 극복의 과정이기도 하다, 불가에서 흔히 말하는 禪,敎학을 일러(禪是佛佛心敎是佛語), 선은 부처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 말씀이다. 라고 말하는 윤산은 이 무렵(1968전후)의 독살이는 바로 이 부처 마음인 참선 수행을 통해서 인생 문제의 대답을 얻어내려는 큰 욕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도 사람이 없다. 움직이는 것들이 없다, 기어다니거나 날아다니는 벌레들과 나무 이파리와 흐르는 개울물과, 하늘의 구름, 밤하늘의 달,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림자들이 움직인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안 보이는 곳에서 그는 비로소 '자연'을 읽는다, 그 자연은 아마도 그 자신과 일체감이 되는 자연일 터이다, 그는 세상과의 인연이나 관계를 끊고,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삶과 본질을 터득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의 공부가 그의 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되었다고 술회 한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는 그림 스승이 없다.' 고 서슴없이 말한다. ' 나의 그림 스승은 자연' 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는 그 '독살이'의 시기에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했다고 할 수 있는데, 개자원 화첩(芥子圓畵帖)의 반복되는 임사(臨寫) 실경(實景)의 끊임없는 사생 등이 모두 이무럽에 축적되었다. 독살이는 그러니까 그에게 인간적 삶의 근본적인 각성과 함께 한 화가의 역량을 갖추게 한 체험으로 작용된다.
"군대엘 들어갔지요, 승가대학 졸업을 못했으니까 영장이 나오면 가야 하지요, 그런데 군복무 시절에 오히려 더 그림을 많이 그렸던 것 같습니다. 높은 사람들이 화선지, 먹 등 그림재료를 사다주면 그림을 그려 다라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부대에서는 제가 '화가'로 소문이 났습니다, 71년 8월에던가, 중앙 공보관에서 그룹전을 열었었어요, 당시 부대에서 함께 그림을 그렸던 친구들이 군대생활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출품한 것입니다. 부대에서 시화전도 열고, 불교신자들과도 「법우(法友)미술전」전 열기도 했습니다."
27살에 제대하여 그는 다시 법의(法衣)를 입지 않았다, 환속하여 화가의 길에 정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서울의 낙원빌딩에 서예교습소를 차렸다. 그의 말대로 라면 "붓글씨 가르쳐서 밥을 먹고 그림만 그리는 거지요"이다, 그는 이 무렵에 서예를 하는 김창동, 김영기, 신덕선 등과 친구로 만나게 된다,.

한편 그는 이 무렵에 자신의 그림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으며, 어떻게 더 공부해야 할 것인가를 묻기 위해 저명한 원로·중진들을 찾아 나선다, 문인화의 대가인 J씨, 당시 인기를 누리던 중견M씨의 화실을 찾아가 가르침을 원했으나 '나는 제자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대로 물러 나오고 말았다, 특정한 스승의 문하에 들어 배운 것도 아니고, 미술대학의 학연(學緣)이나 어떤 인맥에도 얽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그림을 객관적으로 평가받기 위해 여러 공모전에 출품한다, 서예와 사군자 작품들은 이미 고교시절과 승려시절에 전남도전 등에서 몇 차례 입선했으나, 혼자 힘으로 터득한 산수(山水)작품은 70년대의 국전에 출품 한 것이 처음이다. 그의 실경산수는 국전에서 몇 차례 입선을 거듭했고, 동아미술제˙중앙미술대전 등의 민전에서도 계속 입선되었다. 비록 큰상을 받지는 못했으나 그의 작품들은 국전과 민전 입선작 등을 통해 그 유니크한 면모를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의 첫 개인전 77년 서울 미술회관(문예진흥원)에서 열렸다. 이 전시회에 그는 「동양화 사생전」이라는 제목을 달았는데 당시 전통산수 또는 관념산수가 지배적이었던 동양화단에서 그의 이 전시회는 파격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전통산수의 개념을 깨뜨리고 도시와 도시주변의 풍경, 농경풍경 등을 사실 적으로, 또 현장 스케치 위주로 제작한 작품들은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이 전시회에 뒤이어 우리의 전통화단은 전국적으로 사생풍조가 회오리치는 경향으로 발전했다.
그는 실경이나 사생에만 머물지 않고 이번에는 무엇인가 그림에 목소리를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림이 이념을 가지는 경우인데, 그는 공해(公害)문제, 산업사회의 모순 등을 실경으로 제시하기 시작했다. 관광명소의 사생이 아니라, 도시뒷골목, 공장지대, 산업시설과 그 폐기물로 오염된 자연이 그의 화폭에 적나라하게 등장한 것이다, 이 같은 주제와 소재는 물론 종래의 서정적 미의식이나 감각에 물들여진 고급문화주의자의 시작으로서는 거슬리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들은 분명한 현실이고, 우리의 삶을 비인간적 삶으로 만드는 여러 조건 가운데의 하나이다, 윤산은 '내가 보지 않는 세계는 결코 꾸미지 않겠다'는 그 철저한 리얼리즘 정신으로 이 작업들을 밀어 붙였다.

"...처음에는 안방에서 출발하여 관광지, 농촌, 도시의 공장지대로 옮겨가면서 서민의 애환을 찾아 몸부림을 쳤다, 한동안 「사회풍자」와 병행해서 「풍토」시리즈를 다루면서 생활환경의 변화가 심한 서민의 문화를 찾고 싶었다..." 윤산이 쓴 문맥에서 보자면 그의 그림들의 진행은 안방(정물 또는 사군자, 화조)-관광지(山水)-농촌(농경도)-도시(공장지대 또는 난지도)의 궤적을 그리게 된다,
신선이 노닐 것 같은 산야(山野)와 기암괴석, 계곡 등의 산수화를 대해 오던 사람들에게 그의 고해로 찌든 「풍토」시리즈는 분명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는 이 작품들을 여러 군데 공모전에 출품했는데 대부분 낙선의 고배를 들었다.

선구자는 언제나 외롭고 실패하는 법인가. 그로부터 4-5년후 윤산의「풍토」를 닮은 그림들이 서울의 저명한 공모전에서 잇따라 큰상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70년대에 사경산수(寫景山水)의 큰길을 튼 것처럼 한국화에 있어서의 리얼리즘을 개척한 뛰어난 작가의 한사람이 되었다. 공해를 주제로한「풍토의 시대」와「난지도 시대」를 거쳐 80년대에 들어 그의 회화는 「역사(歷史)시대」로 확대되고 있다. 민족 분단과 현실적 제모순. 그리고 기층민중의 삶과 투쟁이 과감하게 화폭에 전개된다. 여기서 그의 그림이 역사시대로 확대되었다고 기술하는 것은 그 이전의 난지도시대나 풍토시대. 그리고 사경산수시대를 모두 사상(捨象) 하거나 청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들을 함께 수용하면서(또는 병행하면서)새로운 세계에 도달하고 있음을 뜻한다. 많은 그룹전 작품들, 그리고 87년에 가진 개인전(신세계미술관) 에서의 일련의 성과들은 그의 이 같은 발전과 심화과정을 잘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최근 광목천에다 단청물감을 사용한 새로운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 서정적인 농촌풍경이나 농경도가 그려지는가 하면 또 다른 그림들에서는 끔찍한 해골바가지와 죽음의 처절함이 묘사 도기도 한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한 화가의 희망과 절망의 두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떤 도덕성을 일깨우는 경구(警句)의 의미를 지닌다. 이 시가 1984년에 제작된 그의 그림에 적혀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너나 없이 숨을 죽이고 살며, 많은 사람들이 불의(不義)에 대하여 온몸으로 대항하지 못했던 그 한 시절, 그는 백악영성(白堊永聲) 이라는 그림에 이 시를 부쳤다.

백성들이 국회의사당 건물을 떠받들고, 중앙청 앞으로 몰려가고 있고, 중앙청 뒤에는 청와대가 어렴풋이 보이며, 그 뒤에는 인왕산 백악봉이 장엄하게 버티고 있는 그림이다. 제5공화국의 어두웠던 시절에, 이러한 그림을 그리고 이러한 시를 지어 스스로를 달래던 그의 모습이 선연하게 내 망막에 서린다. 이때의 그의 모습은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타협을 모르는 강직함과 대쪽같은 선비정신의 풍모 그것이다. 그의 유년의 환경과 체험, 그의 승려생활로서의 깨우침과 독살이, 외로움과 가난과 고통, 그리고 그가 겪어왔던 격동의 시대는 결코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공통분모가 된다.

그의 그림들은 아름답게 주제나 소재상의 문제성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은 기법상·양식상으로도 항상 끊임없는 실험성을 발휘한다. 먹색의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내는 운필(運筆)의 묘(妙), 작가특유의 갈윤(渴潤)을 통해 황토색깔과 같은 한국의 빛깔을 조화롭게 처리해 내는 기량에서 우리는 그의 비범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과감한 역원원근법의 도출, 감필과 생략기법, 선을 파괴하고 면처리 만으로도 효과를 내는 발묵기법 등에서 그의 실험정신이 더욱 돋보이고 있다.

"史誤之不作 民意奉行時 國論自統一 萬聲高低和"(역사를 틀리게 만들면 안 된다. 민의를 받들어 행하면 국론은 저절로 통일되고, 많은 소리들이 화합을 이루게 된다.)
이 한시(漢詩)는 윤산이 직접 지어 화제(畵題)로 삼은 것이다. 한글 번역은 글자 뜻을 그대로 내가 나름대로 해보았다 어떤 다른 심오한 의미가 그에게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분히 상식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같은 근본적인 상식마저 통용되지 못했던 야만의 한 시절에서는 이 시는 분명(!), 아니 극명하게 이 사실을 모든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