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이 용 우(미술평론가) 동아일보 월간 멋 1989년 4월

 
외롭고 처절한 작가에의 길

 

 

작가가 되는 길은 천차만별이다. 반드시 미술대학을 나와야 한다거나 유명한 스승 밑에서 자가 수업을 받아야 자격요건이 갖추는 것은 아니다.
인상파화가 "고갱"은 은행원에다 작품 수장가에서 화가로 전업하여 불세출의 유업을 남긴 작가이며 '반고호' 는 빈농에서 태어나 독자적인 느낌과 작업약식으로 독학의 자산을 남긴 자수성가의 표본이다,
최근 우리 화단에도 대규모의 미술교육기관이 엄청나게 산재해 있음에도 불구, 독학으로 이룬 '자수성가'의 모델들이 상당수 있다. 한국화에 소산(小山)박대성 윤산(允山) 강행원, 그리고 서양화에 이존수, 이석조씨 등 주로 40대 작가들이 그 주인공들.
이들 가운데는 일찍이 출가하여 면벽의 수도세계를 걷던 스님 출신 작가도 있으며 신체의 불구도 딛고 화업(畵業)을 축적해온 작가, 공공장소에서 초상화를 그려주고 생계를 꾸려가다 자신의 고유 작업세계로 전업했던 작가 등 다양하다,
진솔한 작가에의 길로 정착하기까지 이들이 걸어온 길은 자수성가라는 낱말이 갖는 무게만큼이나 절실함으로 가득 차있다.

면벽수도 '독살이'스님이었던
한국화가 윤산 강행원은 43세의 나이답지 않게 복잡다단한 인생역정을 걸어오면서 끝내 화가는 직업에 정착한 작가다,
그는 문인들 중 고은 김성동 등이 승적을 갖고 있다가 파계했던 것처럼 조계종 소속의 승려였으며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 곡성 태안사, 구례의 화엄사에서 불도의 길을 닦았다. 그러다가 불교대학 승가학과에 들어갔으나 당시 5. 3, 6. 8 데모 등 학생운동에 참여, 다시 학교를 그만두고 혼자 암자생활을 하는 독살이(獨生)에 들어갔다.
독살이란 대중처소를 떠나 개인 수도 생활로서 조그마한 암자나, 토굴에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 즉 무념무상에의 선적(禪的) 수행을 말한다, 그런데 윤산은 이 독살이 과정에서 개자원화첩(芥子園畵帖)을 모사하고 사생했으며 '스승 없는 화가에의' 길을 걸었다.
그후 그는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던 이른바 교육받은 유명작가들을 찾아다니며 제자가 될 것을 자청했으나 불교대학 중퇴의 스님출신의 파계자인 그를 맞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독학에 의해 갈고 닦았던 작업을 공모전을 통해 인정받기로 하고 국전,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 등에 출품했다.
몇 차례 입선을 거듭했으나 우리 나라 미술 공모전의 특성이 그러저러하듯 그에게 상복이 터질 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화업에 대한 실험적인 추구를 계속해갔다.
77년 문예진흥원미술관에서 가진 "동양화 사생전"을 비롯하여 '공해주제전' '민중미술전' 등에 참여하면서 자유로운 농담에 의한 운필과 묘, 갈윤(渴潤)을 통한 색채처리, 역원근법의 도출, 감필과 생략기법 등 실험성을 탐색한 조형세계를 선보였다.
이제 그의 이름은 화단에서 낯설지 않다, 그는 확연한 자기세계지지 기반을 갖추어 가고 있으면 그의 탄탄한 기법과 작가적 의식도 크게 인정받고 있다.
윤산은 이제 시작이라고 늘 강조한다, 사람을 스승으로 선택하지 못한 대신 좌절하고 실현했던 경험이 더 좋은 스승이 됐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이 같은 생각은 정규교육을 받았던 작가들이 뒤늦게 깨달았던 사실을 훨씬 앞 당겨 몸서리 치게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또 “그 동안 방황이 심했던 것은 욕심이 많아 실험에 대한 집착이 많았던 것 같다. 이제 얼마동안 진짜 머리를 비우기 위해 입산하여 수행하는 마음으로 욕심 없는 작업,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그림으로 익은 작업을 해 보고 싶다”고 설명한다.